‘동짓달에도 치자 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 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가끔 ……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 우리는 ……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 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詩) 박라연의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전문이다. 털실로 뜬 목도리 같이 포근한 시다.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많아도 신방의 온기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달동네 지하방에서 꽃씨봉투를 접는 가난한 새댁의 사랑은 ‘바보 온달’설화 만큼 애틋하고 절실하다.
가난이 불편해도 사랑으로 채울 수 있다는 신혼이지만 봉합하기 어려운 상처는 있게 마련. 신혼의 단꿈을 한 땀 한 땀 흘려 정성스럽게 깁지만 현실은 꿈쩍 않는 앉은뱅이저울처럼 매정하다.
우리 집 주방엔 이웃 집 아주머니가 손뜨개질해 선물한 해바라기 색 행주 수세미가 걸렸다. 늙고 낡은 주방을 밝히는 꽃등같다. 털실 수세미가 헤질 때쯤 되면 하트 모양에 빨강, 초록, 보라색을 입혀 선물한다.
덕수궁 돌담길, 옷을 벗어야 하는 나무들이 알록달록 뜨개옷(사진을 입었다. 나무마다 ‘꽃’이 피었다. 육각형의 눈꽃송이를 비롯하여 노란 해바라기, 연분홍 벚꽃, 하얀 은방울꽃이 조락의 시린 계절을 포근하게 감싼다. 덕수궁 돌담길을 혼자 걸어도 쓸쓸하지 않다.
나무나 동상, 기둥 같은 공공시설물에 털실로 뜬 옷을 입히는 ‘그래피티 니팅(Graffiti Knitting)’은 2005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친환경 거리 예술이다. 나무의 보온효과 보다는 거리 미관을 예쁘게 하고 거리를 따뜻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더 크다.
서울 중구가 지난 2016년 덕수궁 돌담길에 가장 먼저 도입했다. 지금은 전국의 이름난 공원이나 거리마다 낙엽 지는 가을이면 뜨개옷 입은 나무들을 볼 수 있게 됐다.
겨울의 길목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마음이 무겁고 가슴 아프다. 나목을 감싼 뜨개옷이 아픔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풍경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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