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로사과 200여개를 땄다. 2년 전 마련한 횡성쉼터 텃밭농원의 첫 달림이다. 생각보다 잘 여물었고 서너 개씩 나눈 지인들이 정말 맛있다 했다. 아마추어농부지만 해발 600m 둔내고원 일교차가 큰 덕분인 듯하다. 7월에 감자 캐낸 자리에 무 배추가 자리 잡고 장마에 녹아 내린 푸성귀 터에는 가을상추와 아욱, 콜라비를 심었다. 배추를 크게 키워 김장하라 하면 아내가 좋아하지 않을 터이니 간간히 솎아 국거리하고, 무는 시래기가 더 쓸모 있다.
수확기가 지났어도 고추, 가지가 간간히 달리고 대파와 시금치는 잘 자란다. 방울토마토 잎이 생기를 잃었어도 아직 매주 한 움큼씩 딸 수 있다. 윗집에서 심은 호박 줄기가 내 사과밭으로 내려와 큼직한 멧돌호박이 황금색으로 익어간다. 사과 몇 알 맛 보시라 했더니 담장 넘어 온 맷돌호박은 내 것이란다.
‘실향민 후손의 고향짓기’(2022년 6월호 회보)의 다음 이야기를 해 달라는 원고청탁에 내 일상을 짚어보니 분명 편안하고 행복한 나날이다. 행복의 기준과 잣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행복은 성취(成就)감과 편안함에서 비롯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성취는 상대적인 경우가 많아서 긴장과 경쟁, 갈등으로 이어지고 괴로움의 씨앗이 된다.
학창시절에는 성적과 입시에, 기자시절은 취재경쟁에, 공직생활에서는 주어진 과제와 성과에 스트레스 받았고 잠시의 성취와 만족은 다음 단계의 압박으로 이어졌다. 50줄에 접어들면서 외환위기와 함께 온 정권교체시기에 느닷없이 공직을 떠나야 했고, 다시 서는 과정에서도 좌절과 성취는 되풀이 됐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이 자립하고 현직을 정리하면서 더 이상 성취를 통한 행복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됐다. 그래서 지금과 앞으로의 내 행복의 원천은 편안함이다. 그리고 그 편안함의 행복은 절대적이다. 오늘도 사나흘 돌이로 서울과 시골쉼터를 오가려니 바쁜 일상이다. 감당할 만큼의 바쁜 일상은 육체와 정신건강에 두루두루 최상의 보약이라 했다. 서울에 오면 친구, 선배, 옛 동료들과 약속을 잡고 이런저런 모임에는 빠지지 않는다.
며칠 서울에 머물면 시골쉼터가 궁금해지고 할 일이 생겨난다. 청량리에서 KTX타고 해발 500m 둔내역에 내려서면 하늘은 높고 공기가 달다. 막걸리 한 잔 따라 들고 쉼터 데크에 앉아 ‘산 넘어 산들’을 바라보노라면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해진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잠시 깜박 졸다가 일어나 호미와 낫을 챙겨 들고 텃밭과 과수를 둘러본다.
물질적 풍요와 첨단기술의 편리함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안타깝게도 경제대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상은 혼탁하다. 위선과 내로남불, 뻔뻔한 거짓으로 포장된 정치인, 길 잃은 언론, 양심 버린 지식인, 본분 망각한 공직자들의 이야기가 첨단 소통수단을 통해 넘쳐나고 갈등과 불신사회를 부추긴다. 스마트 기기와 CCTV에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오로지 상업성으로 경쟁하는 TV 프로그램은 소란스럽다.
방송언론 경력을 내세우기 부끄럽고, 내가 책임 맡았던 TBS가 정치편향으로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낀다. 성주괴멸(成住壞滅), 만물은 생겨나서 머물다가 부서지고 흩어진다는 것이 과학이자 진리인데 인간의 생로병사가 바로 그 과정이다. 영원한 것 없으니 ‘일상에서 찾아지는 소소한 행복’이 사실은 ‘진정한 큰 행복’이다.
철골과 시멘트에 갇힌 도시는 스마트 미디어에 중독된 채 앞만 보고 달리는 무한경쟁의 정글이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성취를 추구한다. 나이 들면서 내가 무언가를 이루려는 욕심은 진작에 버려졌다는 생각이지만 불만과 성냄마저 내려놓고 편안함을 찾기는 쉽지 않다.
7순이 훌쩍 지나 마련한 300여 평 횡성산골 마을쉼터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가꾸고, 친구들과 함께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오늘도 600고지 산골에 자리한 쉼터에서 자연에 순응하고, 지우고 버리고 내려놓는 삶을 찾아 편안한 행복에 잠긴다. 2022. 10.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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