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을은 유난히 쓸쓸함이 더해지는 옷자락을 그림자처럼 끌고 가면서 하루하루를 보낸 것 같다. ‘내 인생의 가을’이라고 할 만한 해이다. 허무하면서도 그 속에 일상의 조용한 행복이 있는 가을이다.
그동안 1백여 권의 저서와 1천여 편의 시를 써왔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책은 만들어지고 시들은 읊어졌다. ‘서양철학의 종언과 한글철학의 탄생’이라는 나름대로 철학적 대작을 탈고해서 교보문고에 깔았고, ‘신(神)통일한국론과 하나님주의(Godism)’라는 소품을 출간해서 인간에게 신(神)의 의미가 무엇인지, 반성해보는 기회도 가졌다. 또한 ‘시와 철학의 노래’라는 3백여 편의 엔솔로지(anthology)도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나름대로 수확의 계절이었다. 그런데 왜 쓸쓸함이 마치 병처럼 따라다니는 것일까. 우리말로 ‘쓸쓸함’은 ‘고독’이나 ‘허무’, ‘데카당스’와도 다른 묘한 기분을 내포하고 있다. 쓸쓸함에는 ‘쓸다’ ‘쓸어버리다’의 의미도 있는 것 같고, ‘쓰다 버린’, 심지어 ‘쓰레기’의 의미도 있는 것 같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이고, 쓸쓸함의 계절인데, 왜 동시에 수확의 계절인가. 봄이 소녀의 계절인데 비해 가을은 왜 늙은 남자의 계절인가. 가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는 가을이 되면 가장 많이 들려지는 노래이다. 가사 중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이라는 구절도 있다.
늙은 남자에게는 아예 사랑의 기회가 없으니 실연의 기회도 달콤하다고 반어법을 쓴다. 실연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젊음의 특권이다. 젊음이 권력이고, 영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본질주의자는 아니다. 삶은 본질(essence=Idea)이라기보다는 실존(existence)이라 생각한다. 본질이 앎의 철학편이라면, 실존은 삶의 철학편이다. 실존의 ‘exist’라는 단어를 해자하면 ‘ex-ist’이다. ‘ist=이다(동일성)’이니까, 삶은 ‘동일성(정답)의 밖에 있는 것’이고, ‘동일성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실존주의는 이데아(idea) 전통의 서양철학이 생성·변화하는 세계를 다시 인정하기 시작한 철학사조이다. 철학자 헤겔은 인간학과 신학을 통일하면서 절대지(絶對知)를 주장했다. 인간과 신은 혹시 자기투사가 아닐까.
가을을 주제로 몇 편의 시를 쓴 기억이 있다. 올해에는 내 생애 처음으로 ‘자화상’이라는 시를 써보았다. 자기정리인가 싶기도 하다. 그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자화상(自畵像)
고도근시(高度近視)인 나는 군대에도 못 갔다. 평생 먼 곳을 보기 위해 안경알을 바꾸었다. 전쟁은 아예 할 수 없는 못난 인간이었다.
내 안경의 왼쪽 알에는 0가 쓰여 있었고, 오른쪽 알에는 1이 쓰여 있었다. 내 안경은 그것자체로 ∞가 되었다.
내 코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봉우리처럼 내 안경을 충실한 신하처럼 받치고 있었다. 자아(自我)를 상징하듯 우뚝 솟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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