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가 시끄럽다. 눈만 뜨면 날이면 날마다 여·야 간 공방전이 뜨겁다. ‘정치란 의례 그런 거지!’ 하고 바라보면 별로 특이할 것도 없다. 하기야 정권을 둘러싸고 늘 여·야간 치열한 샅바 싸움을 벌이는 게 정치 아니던가? 더구나 ‘여소야대 정국이니 오죽하겠나!’ 하고 치부해 버리면 오히려 속 편하다.
정가는 정치판이니 그렇다 치자. 요즘 우리 방송가가 정치판 꼴을 닮아 야단법석이다. 방송계에 무슨 여·야가 있을 리도 없는데 공·수전 뜨겁기가 정가의 힘겨루기 못지않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종합편성채널(‘종편 채널’) 재승인 평가 점수조작 의혹 회오리로 시끌벅적하다. 뒤질세라 방송심의위원회도 세칭 ‘편 가르리즘’ 논란으로 소란스럽기가 마찬가지이다.
공영방송 KBS는 까마득한 월남전의 ‘한국군 양민학살 의혹’ 방송으로 ‘월남참전자회’ 회원들과 국가보훈처의 항의데모와 성명에 맞대응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방송관련 시민단체와 공영방송사 노동조합이 한 목소리로 한상혁 방통위원장과 정연주 방심위원장 사임을 요구하고 있는데다 KBS에 대한 감사원 감사결정과 MBC·YTN·연합뉴스TV·TBS 등 공영성 방송사들의 경영진 퇴진 요구까지 겹쳐 방송가는 말 그대로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난리다.
방심위,‘편가르기 심의’고발당해 KBS, 월남전‘양민학살’추적 뭇매
‘종편 길들이기’ 의혹 방송통신위원회법 제12조는 방통위의 소관 사무를 일일이 나열하고 ‘각 호의 사항을 심의·의결한다’라고 적고 있다. 여섯 번째 항목은 ‘지상파방송사업자·공동체라디오방송사업자의 허가·재허가에 관한 사항’, 그리고 바로 다음, 일곱 번째 항목은 ‘종합편성이나 보도에 관한 전문편성을 하는 방송채널사용업자의 승인에 관한 사항’으로 돼 있다.
지상파나 종합편성 가릴 것 없이 ‘방통위’는 심사 결과 기준에 미달할 경우 해당 방송사를 폐업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방송사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권한은 반드시 책무를 수반한다. 권한의 크기에 따라 책무의 무게도 달라진다. 방송사의 숨통이 걸려 있는 방통위의 심사는 그만큼 엄정·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감사원 감사로 방통위 심사과정의 동티가 드러났다. 2020년 종편 재승인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 일부가 TV조선의 점수를 고의로 낮춘 정황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감사원 감사 과정에서 “당시 일부 심사위원들이 알아서는 안 될 ‘가채점 결과’를 미리 알았다”는 증언이 확보됨에 따라, 감사원은 방통위가 관련점수를 조작한 것으로 보고 이들 자료를 검찰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TV조선의 평가 총점은 653.39점, 650점인 재승인 기준 650점은 살짝 넘어섰다. 그러나 중점 심사항목인 ‘방송의 공적 책임·공정성 항목’에서는 기준점보다 0.85점이 낮았다. 재승인 거부 조건 중 하나인 과락(科落)을 한 것이다. 결국 TV조선은 공정성 점수미달로 ‘조건부 재승인’을 받게 되었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위험천만의 족쇄를 찬 셈이다.
방통위와 심사위원들은 ‘점수담합은 불가능한 구조’이고 ‘점수 수정이 있긴 했지만 적법한 절차를 밟아 문제 될게 없다’며 강하게 손사래를 치고 있다. 그러나 여당인 국민의 힘 미디어특위는 “문재인 정권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방송사에 편파·왜곡 프레임을 씌우고 언론자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방통위와 방심위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라며 “방통위 한상혁 위원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수사기관의 수사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교통방송 봐주기 의혹 이번에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정연주 위원장과 방심위 관계자 등 9명을 대상으로 국민의힘 당 미디어특별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MBC와 교통방송(TBS)에 대해 ’봐주기 심의‘를 한 혐의다.
고발장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방심위는 MBC의 2020년 4월 1일자 단독 기사(‘최경환 측 신라젠에 65억 투자 전해 들어’) 내용이 재판 결과 허위로 밝혀졌는데도 이 보도에 대한 심의·의결을 진행하지 않음으로서 방심위 위원으로서의 직무를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했다.”
또 “2021년 8월 12일 방송된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진행자 김씨의 ‘표창장 하나로 징역 4년’ 발언에 대해 과거 심의규정 위반으로 ‘권고’ 의결을 하고도 (지금껏) 심의안건으로 상정조차 하지 않아 직무를 거부했다.” 방심위가 MBC와 TBS에 대해 이른바 ‘봐주기·편 가르기 심의’를 했다는 주장이다.
정연주 방심위원장은 “심의위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 외부의 정치적 혹은 이런저런 평가에 대해 흔들릴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도 이 사안에 대한 구체적 해명은 내놓지 않고 있다. 검찰의 수사 결과야 발표되겠지만 편파심의 논란과 고발이 일어나고 있는 자체가 이미 방송가의 수치다.
참점용사들 항의 시위 프로그램이 일단 방송전파를 타면 동시에 많은 사람이 그 내용을 듣고 보게 된다. 공감이나 비판이 바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방송 제작에서부터 방영까지 신중을 기해야 하고, 데스크니 게이트키핑, 사전심의 등을 반드시 거치는 이유다. 그래서 방송은 사회적 공기(公器)로도 불린다. 공영방송은 더욱 그렇다.
지난 8월 KBS 1TV 전파를 탄 ‘시사멘터리 추적(얼굴들, 학살과 기억)’을 놓고 항의 집회와 성명이 잇따르며 후유증이 깊어지고 있다. 프로그램은 지난 1968년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중부의 작은 마을 ‘퐁니’와 ‘하미’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2년 전 한 베트남 여성이 ‘당시 한국군 군사작전으로 이곳에서 가족을 잃었다며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다.
방송이 나가자마자 베트남 참전자회 단체와 참전군인들의 항의집회가 KBS 여의도 본사 앞을 비롯해 전국에서 일어났다. 국가보훈처조차 “KBS가 월남전쟁에 참전한 우리 국군들의 월남 민간인 학살의혹을 기정사실화 하는 편파방송을 했다”며 “심각한 유감을 표명한다”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국가 기관이 방송, 신문 등 언론보도에 대해 이처럼 강한 유감성명을 내놓은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도대체 KBS 프로그램이 어떻게 제작·방영되었기에 이처럼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방송 다시보기’를 통해 몇 차례 반복해 프로그램을 되돌려 보았다. 제목에 들어있는 ‘학살’이라는 단어부터가 섬뜩했다.
프로그램은 베트남 피해자 증언으로 시작된다. “한국군이 우리 가족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을 학살했어요”, “학살날에 마을버스가….사람도 집도 불태워….군인들이(한국군이) 주민들을 몰아넣어서 그 집에서 총으로 난사했어요.” 누구나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는 처절한 내용이었다.
프로그램 제목과 첫머리부터 등장하는 ‘학살’이라는 단어가 25분여 길이의 프로그램이 끝날 때 까지 수없이 반복된다. 이 프로그램 속 베트남 파병 한국군은 ‘수류탄으로, 총기난사로 양민을 죽이는 학살자’일 뿐이다.
어떻게 이런 방송이, 그것도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인데…! 버젓이 전파를 탈 수 있었는가? 층층시하, 그 많은 차장, 부장, 본부장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었는가? 30년 이상 KBS에 근무했던 필자에겐 놀라움을 넘어 이 모든 게 신기(?)하게 다가올 따름이었다.
혼란·혼돈·소용돌이…. 방통위에 방심위, 공영방송들까지 한 군데도 편안한 곳이 없다. ‘꼬일대로 꼬여버린’ 방송가의 난맥상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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