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종서<본회 논설위원, 한 국문명사연구소 대표>

3년 전쟁 중에 중·고교 이상 대학을 다닌 학생들은, 전란으로 휴학 또는 중퇴하고, 전황에 따라 이곳저곳 피난하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지금의 80~90대가 그런 <6·25학생세대>다.

나는 1950년 강화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경동중(京東中)에 입학했다. 곧 북한 남침으로 세 곳으로 학교를 옮겨 다니며, 휴전반대 시위에도 참가했다. ‘임시취학생’ 신분으로 중학의 3학년 6학기 중 세 학기만 다니고, 졸업장 없이 수료증으로 졸업, 고1 때 휴전을 맞았다.

6·25로 허망한 학창시절

그해(1950) 서울의 대부분 중학입학은 6월 5일(월), 경동중학은 6월 1일(목)이었다. 북한이 남침한 것은 그달 25일(일).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의정부·문산에 살거나 주말 동두천·춘천의 집에 갔던 학생들은 피난준비 하느라고 잠을 못 잤다면서,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졸고 있었다. 전선에선 전쟁이 한창이고, 거리에선 군인들이 승전가(勝戰歌)를 외치며 전선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오전수업은 정상대로 진행됐다.

점심시간이 되자 ‘전교생 교정집합’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조회 때처럼 운동장에 정렬했다. 양재순(梁在純) 교장이 단상에 올라 말했다. “전쟁으로 더 이상 수업할 수 없어 무기휴학에 들어간다. 학교는 폐문이다. 개학통보 때까지 등교하지 말라.” 양 교장은 경동 제3대 교장. 전쟁 중 납북됐다고 한다.

한강대교 폭파 고향 길 막혀

나는 짐을 싸들고 동대문 남쪽 황금동(黃金洞)의 서울-강화행 버스종점으로 갔다. 북적대던 장소가 의외로 조용했다. 길이 막혀 버스운행이 모두 중단됐다고 한다. 28일이 되자, 국군이 새벽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서울 거리 곳곳엔 북한 인민군 탱크들이 들어와 진 치고 있었다.

그 후 신문도 없고 방송도 멈췄다. 교통이 막히고 우편도 사라졌다. 서울은 물론 인민군 점령지 전체가 암흑천지였다. 강화도 섬마을에서 혼자 서울에 와있던 나는 만12세. 이미 북한군에 점령돼 있을 강화 가족들은 내 사정을 얼마나 궁금해 할까.

고향과 가족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 나는 풀어낼 길이 없었다. ‘고향’ 소재의 시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가장 강렬하게 끌리는 것이 1949년도 경동중 교지 ‘학해’(學海 4호)에 실린 2학년 A.P생의 시 <고향>이었다. 2년 선배의 그 망향시(望鄕詩).

경동중 교지에 실린 중2의 望鄕詩

이니셜 시인 영문학자 고영주 교수

향기 짙은 산속, 맑은 새소리, 구름에 올라앉아, 갈매기 갈갈 우는, 돛단배…. 시어(詩語) 하나하나가 고향에서 보고 느낀 그대로였다. 문학소년의 꿈에 젖어 많은 시를 읽어온 내겐 <고향>이 가장 감동적인 시였다. 틈나는 대로 읽고 또 읽으며 공산치하의 무섭고 어두운 세월을 견뎌갔다. 

 

나흘 걸어 강화도 고향집 귀가

하숙집은 강화도 출신 친척집이었다. 집주인은 나와 같은 항렬(行列)의 형님뻘이면서, 산업은행(당시는 殖産銀行) 감사역. 피난은 못 갔지만 부유한 편이었다. 그해 가을이 되어 살림이 궁해지자, 주인은 9월초 나를 데리고 걸어서 강화로 갔다. 농촌인 강화엔 식량이 있기 때문에, 식구를 나눠 굶지 않고 살기 위해서였다. 나흘을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유엔군은 인천상륙을 위해 사전포격을 계속하여 그 포성이 강화까지 들렸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 휘하 한미연합군이 인천상륙에 성공하고,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유엔군이 북진하여 압록강에 이르자, 10월 중공군이 개입했다. 전선은 다시 남으로 밀려 1·4후퇴가 됐다. 우리 가족은 충청남도 장고도 섬으로 피난. 전선이 다시 북진하여 이듬해 5월 귀가했다.

돌아와 보니 학제가 바뀌었다. 입학 때는 6년제 중학교였는데, ‘중3·고3제’로 나뉘어 있었다. 경동중 26일 만을 다니고 나서 처음으로 안양중 2학년 2학기로 들어갔다. 경찰관이었던 부친이 인천경찰서로 전근되어, 중3은 인천에서 마쳤다.

중졸 후 서울의 경동고로 가려했으나, 한수(漢水) 이남에선 한강 통과가 쉽지 않았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기차로 가서, 한강대교 남단의 헌병대까지 걸어가 도강(渡江) 수속을 밟는다. 허락되면 기다리다가 헌병이 잡아주는 빈 트럭을 타고 강북 시내 적당한 곳에 내려서 학교로 가야했다. 인천에서의 서울통학이 이렇게 어려워, 나는 경동을 단념하고 인천고에 들어갔다. 어렵게 맺어진 시골 섬마을 출신의 나와 서울학교 경동의 인연은 여기서 끝났다.

그로부터 69년 뒤인 2019년 경동고교 신범영(辛範榮, 28대) 교장을 만나 경동과 나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진지하게 듣던 신 교장은 경동에 대한 나의 애착에 공감하면서, “요즘 학생들은 모교 애착심이 과거와 같지 않다”고 했다. 다음날 신 교장은 전화로 곧 ‘학해’ 담당자의 연락이 갈 터이니, 잘 부탁한다고 했다. 나흘 뒤 편집교사로부터 원고청탁서가 왔다.

나는 애독시 <고향> 등 경동과의 관계 200자 130매를 써 보냈다. 단편소설 분량이다. 이 글이 경동 <제68호 學海>에 실린 것은 2019년 겨울. <학해>를 읽은 경동고 동창 몇 명이 나섰다. 그들은 나를 명예졸업자로 학교에 추천하고. ‘2학년 A.P생’도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경동고 12기 동문으로 2020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만나고 싶었으나 두문불출

망향시 A.P생이 시인이 됐을 것이라 믿고 한국문인협회 시인명단을 살펴보았으나 없었다. 후배 고동준(高東俊, 경동24기)씨는 ‘A·P생’의 본명은 고영주(1948년 입학·경동10기)이고, 내가 잊고 있던 고향시 2절까지 찾아서 알려 줬다. 고교 영어교사였던 그는 창고에 쌓였던 비공개 서류를 뒤져, 1949년도 경동중 <학해>를 찾아내 그런 사실을 밝혀 보내 줬다.

고영주 교수는 부산대 퇴직후 강원도 원주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고동문은 그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면담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경동 제10회 동기회에 물었더니, 그는 동기회 모임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외부출입 타인 접촉을 일체 않는 두문불출형(杜門不出型)이라 했다. 나는 애독시인인 그를 꼭 만나고 싶었지만, 대화나 접촉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