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보기 작게보기
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카카오스토리밴드 네이버블로그구글플러스
5학년 담임선생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 오! 내고향 / 안평선 회우의 경기도 광주 퇴촌
2023년 01월 05일 10시 43분 입력

 

▲1948년 초등학교 5학년 때 필자. 오른쪽이 李豊浩 담임선생님. ‘소쩍새 울고 비오는 밤’ 등 
자작 수필을 읽어주셨다.

 

75년 지났어도 생생하게 떠올라

안국동 부모님, 날 시골 학교로 보내

 

고향이 광주라고 하면 “어디 광주냐?”고 되묻는다. 내 고향은 경기도 광주 퇴촌이다. 광주산맥이 남한강을 건너 우뚝 솟은 앵자봉 기슭이다. 광주군은 양수리 두물머리를 경계로 해서 뚝섬 건너 봉은사에서 송파, 말죽거리를 지나 지금의 학동역까지, 16개 읍면으로 넓은 군이었다. 광주는 고려시대 이래로 불리고 쓰여 온 지명이다.

 

공영방송이 가요 쇼 공연을 하는데 ‘경기광주공연’으로 타이틀을 붙였다. ‘광주남한산성공연’이라 했으면 더 정확했을 텐데, 굳이 앞에 도(道)를 붙였다. 광주군은 시(市)로 승격하면서 하남시, 성남시로 독립되고, 서울의 황금벌판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로 편입되면서 금싸래기를 다 잃었다. 팽창 발전의 핵분열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에는 조선시대 청렴하게 벼슬을 마친 양반들이 낙향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보다는 우리 시대에 직접 바라보고 접해온 인물을 꼽아서 되새겨 보고 싶다. 여러 사람 있겠지만 단연 한 분으로는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이다. 해공 선생은 초월면 서하리에서 태어나셨다. (1894-1956.5.5) 학문하는 가문에서 어린 시절에 한학을 전수하고 상경하여 관립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임시정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내무총장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상해 임정시절에 선생의 영어능력이 폭넓게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부의장 당선에 이어서 의장을 맡았고, 야당 국회의장으로서 의정을 무리 없이 원만하게 이끌어 명 의장으로 존경을 받았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사상초유 30만 인파를 향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외쳤다. 5월 5일 호남유세차 전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하시었다. 충격과 슬픔에 몰려온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선생의 운구차를 밀고 타도 이승만을 외치며 경무대까지 달려갔고, 경찰의 총격으로 몇 사람이 쓰러지고 해산되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던 정권교체는 이루지 못하고 자유당 정권의 말기를 맞이하게 된다. 선생의 생애는 독립운동과 민주화 투쟁이었고, 효자동에 빌려 살던 작은 ㄱ자 한옥은 도로 내주어 집 한 칸도 남김이 없었다.

 

산천은 타관처럼 변해졌지만 그래도 고향이다. 후손들이 살고 있고 학교가 훨씬 커졌지만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다. 어려서 학교 다닐 때의 추억은 영원한 향수로 잊혀지지 않는다. 퇴촌은 지금은 드라이브 코스처럼 익숙하게 알려졌지만 1960년대 중엽까지만 해도 전기는 물론 일체의 문화혜택이 없이 산으로 꽉 막힌 두메산골이었다.

 

나는 1936년 퇴촌에서 태어나서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다가 네 살 때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올라와 안국동에서 살았다. 서울은 놀랍고 다른 세상이었다. 그렇게 서울구경을 하며 9살이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다시 고향으로 데리고 가서 시골에 있는 도수(陶水)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철들어 생각해보니 안국동집이 총독부(중앙청)와 가까워서 미국 비행기가 무서운 폭탄이라도 터트리면 막내라도 구해보자고 시골로 보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944년 아홉 살 때 1학년에 입학했다. 학교는 작은 목조건물로 좁은 운동장을 반으로 갈라서 한쪽에는 상급생들이 밭으로 갈아서 농작물을 심는데 상급생 중에는 결혼한 학생도 있다고 했다. 교장은 일본 사람 미하라이고 담임선생은 교장 부인이고 딸 가스코는 함께 입학해서 한반이었다.

 

조회 시간에는 군복차림에 렌다이죠(연대장)의 지휘에 따라 동쪽(일본)을 향해 경례하고 열을 맞추어 좁은 운동장을 돌았다. 1학년은 남녀 합해 40여명인데 나를 반장을 시켰다. 서울에서 왔다니까 좀 달라보였나 보다. 일본 동요를 배우고 글자 몇 자씩 가르쳤다. 가끔 냇가로 소풍놀이를 할 때 담임선생님이 손을 잡고 얘기도 했는데 일본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했는지 알 수 가없다.

 

2학년으로 진급해서도 담임선생은 그대로였다. 8‧15광복을 맞았다. 며칠 지나서 아침에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가는데, 교장 가족이 보따리 잔뜩 메고 다가온다. 가스코도 가방을 메고 손에도 들었다. 담임선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입이 안 벌어지고 머뭇머뭇하다가 그냥 꾸벅했다.(현해탄을 잘 건너갔는지?)

 

광복 후 얼마 안 있어 아버님께서 급환으로 돌아가시고 서울생활은 정리가 되었다. 서울의 꿈은 멀어지고 서울 쪽 하늘만 쳐다보게 되었다.

 

1948년 5학년이 되었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서울에서 전문대학을 다니신 분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부를 때 ‘야자’ 없이 “평선, 경석, 영숙” 이렇게 불렀다. 우리들은 어색했다. 선생님은 어려운 얘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데 우리들은 알아듣지 못해서 불안하기만 했다.

 

얼마 쯤 지나서 노래를 가르쳐 주시는데 어렵고 배우기가 힘들었다. 학교에 풍금이 있었는데 풍금을 칠 줄 모르시는지 구두로 선창하면서 가르쳤다. 한 소절 부르시면 우리들이 따라 부르고,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면서 몇 곡을 따라서 배웠다.

 

나중에 중학교에 진학해서 알게 되었다. 첫 곡은 로렐라이 언덕, 볼가강의 뱃노래, 코로라도의 달밤 등등이었다. 생각해보면 거의 불가능한 수업이지만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치셨다. 시골 어린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려고 무리한 걸 무릅쓰셨나보다.

 

도수학교 운동회 준비를 하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응원단장 하는 걸 가르치고 연습시켰다. 생전에 구경도 못해본 일,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선생님 따라서 흉내 내듯 337 박수, 물결박수를 익혀서 색색이 옷을 입고 운동회를 치렀다. 구경 왔던 부모님들과 면민들은 신기한 구경에 박수를 보냈다.

 

선생님은 또 욕심을 내서 새로운 노래를 골랐다. 우리 학교에 광복 직후에 마련한 ‘깨치자 배우자’하는 교가가 있었다. 교가는 함부로 바꿀 수 없으니 5학년 반가(班歌)로 하자고 가르치셨다. 기억나는 가사.

ㅡ젊은 가슴 숨은 생명 힘 넘쳐 뛰노라 이 힘이여 이 생명을 펼 곳이 어디냐 눌린 자를 쳐들기에 굽은 것 펴기에 쓰리로다 부리리라 이 힘과 이 생명 도수학교 도수학교 우리 모교 도수학교ㅡ 

 

먼저 배운 노래들은 잘 모르겠고 어려웠는데 이번 노래는 쉽고 힘이 있어서 우리들은 신나게 목청껏 불렀다. 그런데 교장이나 학교 선생님들은 별말이 없었는데 면내 유지들 중에 노래가 이상하다고 의아해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갈 무렵 어느 날 낯 모르는 사람이 학교로 찾아와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선생님과 함께 나가셨다. 잠깐 다녀오시려나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선생님은 돌아오시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이 담임을 겸해서 남은 5학년을 마치도록 선생님은 소식이 없었다. 아 왜 못 돌아 오셨을까?

 

바로 6학년이 되고, 훌쩍 잊고 졸업을 하게 됐다. 계셨으면 100세도 넘으셨을 선생님의 함자는 李豊浩이시다. 가르치신 노래는 이광수 작사 김영환 작곡의 보성전문학교 교가이고 지금도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교가(校歌)인 구교가 신교가로 함께 부르기도 한다.

 

1950년 졸업사진에 이풍호 선생님은 볼 수 없고 남녀 47명이 졸업했다. 나 혼자 서울로 진학, 용산중학교를 20일 다니고 6‧25전쟁, 여기저기를 거쳐서 1957년 선생님께서 다니신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75년이 지나 새해를 맞는 제자는 선생님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안평선<전 KBS 춘천방송총국장, 전 방송심의위원> kjnews@kjnews365.net